진화한 마음 / 전중환 / 휴머니스트
친자식은 1/2 만큼의 나다. 친형제도 1/2 만큼의 나다. 조카는 1/4만큼의 나다. 사촌은 1/8만큼의 나다. 따라서 친동생이 급하게 청하는 부탁은 웬만하면 선뜻 들어줄 수 있다. 친동생 (=1/2만큼의 나)이 얻는 이득이 내가 입을 손실보다 대개 두 배는 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붙이에 대한 호의는 미래의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이타적 행동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비친족에 대한 호의는 미래의 보상 은혜를 돌려받음, 혹은 내 평판이 높아짐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대하는 상리적인 행동이다. (상리적 : 서로 이익을 얻고 있는. 또는 그런 것)
자식 하나가 어느 정도 혼자 앞가림할 때까지 키워낸 다음에 아기를 새로 잉태하는 유인원 어미와 달리, 인간 여성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챙겨줘야 하는 아이를 한꺼번에 여럿 키워야 하는 이중 부담을 짊 어진다. 이상의 특성들을 고려하면, 우리 종에서는 엄마 혼자서 자식을 보살피기보다는 엄마와 더불어 대행 어미, 즉 아빠, 조부모, 손위 동기, 삼촌/이모/고모, 사촌 등도 양육에 동참하는 가족 모델이 진화 했으리라는 결론이 얻어진다.
여기서 물음이 하나 생긴다. 그냥 아빠만 자식을 함께 돌보면 되지 않을까? 영장류학자 허디는 인류가 진화한 먼 과거의 환경에서는 빈 번한 전쟁, 싸움, 전염병, 사고 등으로 성인 남성의 사망률이 높았음을 강조한다. 일부일처제적인 핵가족이 당시에 보편적이었다면, 매우 많 은 여성이 남편이 죽거나 크게 다치는 바람에 홀로 자녀 양육의 굴레를 짊어지는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남성들은 사냥을 허탕 치는 날이 많다. 어쩌다 사냥에 성공했다 해도 잡은 고기는 아내 와 자식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다 함께 나누어 먹는다. 즉, 아빠 혼 자서는 매일 매일 다량의 음식을 요구하는 아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 기 어려웠을 것이다.
친자식인지 아니면 옆집 남자의 자식인지 확신할 수 없다(그래서 '엄마의 아기, 아빠의 아마도mother's baby, father's mayby'라는 표현도 있다).
외할머니의 경우, 손주와의 연결고리인 할머니에게서 딸 그리고 딸에게서 손주는 둘 다 확실하다. 반면에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경우, 손주와의 두 연결고리 가운데 하나는 불확실하다. 친할아버지의 경우, 연결고리 둘 다 불확실하다. 따라서 손주에게 가장 많이 투자하 는 조부모는 외할머니고, 중간 정도로 투자하는 조부모는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고, 가장 적게 투자하는 조부모는 친할아버지일 것으로 기대된다.
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미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네 명의 조부모 가운데 누구에게 가장 친밀감을 느끼는지, 어릴 때 얼마나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얼마나 선물을 받았는지 등을 조사했다. 예측대로 외할머니가 손주에게 가장 많이 투자했고, 친할아버지가 가장 적게 투자 했다. 아직 남아 있는 28개의 원시적인 사회를 비교 조사한 인류학 연구에서도 외할머니는 어느 사회에서나 아이의 생존 가능성을 유의미하게 높여주는 요인이었다. 손주가 찾아오면 허리춤에서 꼬깃꼬깃 접힌 돈을 꺼내어 한사코 쥐여주는 따뜻한 외할머니는 어느 사회 에서나 있었던 셈이다.
핏덩이가 마침내 어른이 되기까지, 부모는 무력한 아기를 집중적으로 먹이고 보호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였다. 이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진화적 '게임'에서 새로운 무대가 시작되었다. 아기가 "이것 좀 보세요! 진짜로 내가 이렇게 어리고 서툴다니까요!”라고 부르짖으며 자신의 무력함을 부모에게 홍보하는 감각 신호를 마구 뿜어내게끔 자연 선택된 것이다. 영장류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는 아기가 부모에게 '귀엽다'고 여겨지는 시각적, 후각적, 청각적 신호를 통해 부모의 보살 핌을 얻어내는 '감각적 덫 sensory trap'이라고 했다.
인간 아기가 부모를 감각으로 녹이는 덫이라는 관점과 부합하는 사 실이 하나 있다. 다른 유인원 새끼들과 비교하면, 인간 아기의 운동 능력은 크게 뒤처지지만 감각 및 인지능력은 대단히 탁월하다는 것이 다. 예를 들어, 신생아는 시력이 온전치 않긴 해도 자기 얼굴에서 30~45센티미터 떨어진 물체에 정확히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 정도 거리에 있는 물체가 무엇일까? 아기가 젖을 빨 때 아기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두 눈이 대략 그 거리에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눈 맞추기는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애착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요컨대, 아기는 부모에게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리는 감각 신호를 보낸 다. 이 신호는 부모에게 상냥함이라는 정서를 촉발해 부모가 아기를 '귀엽다'고 여기고 정성껏 보살피게 만든다. 로렌츠는 이 같은 상냥함을 일으키는 아기의 전형적인 신체적 특징을 '아기 스키마(baby schema)'라고 불렀다.
A와 B가 싸운다. 지켜보는 C의 입장에서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나중에 자신이 분쟁에 휘말리면 기꺼이 C의 역성을 들어줄 사람을 택하는 것이다. 바로 동맹 구축이다. A와 B의 분쟁에 C 가 A의 편을 자처하며 뛰어든다면 C는 당장은 손해다. 하지만 이 손 해는 앞으로 C를 든든하게 지지해줄 동맹자(A)를 확보한다는 이득으 로 넉넉히 상쇄되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내가 A와 B 가운데 누구의 편을 들어주는가는 나중에 내가 분쟁에 휘말렸을 때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누군가에 달렸다. 그 러므로 나는 A 또는 B의 친구 랭킹에서 각각 내가 몇 등에 위치하는 지 알 필요가 있다. 만약 내가 A의 친구 랭킹에서 2등이라면, A는 향 후 내가 개입된 분쟁에서 대체로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A의 1등 친구와 시비가 붙는다면, A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동맹 가설을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다른 친구들의 이름보다 상위권에 올려놓는 친구를 더 좋아할 것이다(“너 나 좋아? 그럼 나도 너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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