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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한줄

[책한줄] 일의 기쁨과 슬픔

by 신바람~독서 2022. 11. 12.

일의 기쁨과 슬픔은 알랭 드 보통의 책 이름과 같다. ( * 제목은 알랭드 보통이 쓴 동명의 에세이에 착안했다. ) 라고도 쓰여 있다. 책은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단편 - 제목들.. 

잘 살겠습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 다소 낮음 / 도움의 손길 /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 / 새벽의 방문자들 / 탐페레 공항

 

키보드 밑에 깔려 있던 흰 봉투를 발견한 건 빛나 언니와 한정식을 먹고 두달쯤 지난 시점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책상을 닦으려고 키보드를 들지 않았으면 아마 계속 모르고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봉투를 열자 "우리 결혼 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카드가 나왔다. 빛나 언니의 청첩장이었다.

이게 뭐야 밥도 안 사고 그냥 이렇게 던져놓고 간 거야? 청첩장이 무슨 피자집 전단이야? 나는 원래 빛나 언니의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축의금도 오만원 정도 낼 생각이었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었으니까. 정식으로 시간 내서 청첩장을 준다면 분명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쯤 되자 더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라면, 나라면 정말 이렇게는 안 해. 손에 쥐고 있던 텀블러의 뚜껑을 열어 청첩장 위에 세차게 내려놨다. 뚜껑에 묻어 있던 커피가 새하얀 청첩장 위에 동그란 형태로 번졌다. 나는 텀블러에 남은 아이스커피를 얼음째 씹어 마셨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25,000(축의금 대신 먹은 밥값)-13,000(내가 청첩장 주면서 산 밥값) =12,000

이제는 남편이 된 구재에게 내 계획을 들려줬다. 주말에 함께 들른 백화점의 생활용품 코너에서였다. 나는 언니에게 받은 만큼만, 딱 만이천원짜리 선물을 사서 축의금 대신 줄 거라고 했다.

 

딩동.

초인종이 또다시 울렸다. 여자는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들은 소리가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해 당황했다. 딩동. 한번 더 울리자 그제야 서늘한 공기가 여자의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여자를 찾아올 사람도 없었고, 이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더 남은 택배도 없었다. 무엇보다, 새벽 세시였다. 이 시간에 초인종이 울릴 이유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불이 켜지기 직전, 바퀴벌레로 꽉 찬 방을 상상하는 일처럼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현관 쪽으로 다가가 문에 달린 렌즈를 들여다봤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도는 복도의 조명을 받고 서 있었다. 차림새가 예상 밖으로 단정했다. 무채색의 정장 차림이었고 푸른색의 타이를 맸다. 블레이저 위에는 무릎까지 오는 트렌치코트를 덧입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아티스트님께서."
돈사장이 장우 쪽으로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면서 어금니를 하도 꽉 깨물고 있었더니 턱관절이 다 아팠다. 장우가 입을 열었다.
"혹시 계약......”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자 돈사장은 "뭐라고?" 하며 되물었다. 장우가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계약할 수 있을지 해서요."
돈사장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장우의 어깨를 짚더니 두어차례 두드렸다.
“요새 우리가 키우고 있는 애들이 많아서. 지금은 어렵고, 내가 여력이 있으면 다시 전화를 줄게."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 친구 타이밍 참 못 잡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회사 생활 십오년 하면서 한번도 운 적이 없었거든요. 루바 공연 건 때문에 특진 취소되고, 팀 옮겨지고, 강남에서 판교로 짐 싸서 올 때도 눈물이 안 났어요. 그런데 그 포인트를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너무 막막해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장우의 눈에 베란다에 있는 그 후로 이주를 아주머니께 마지막 기회를 드린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그녀가 그날의 일을 다 마치고 옷방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서 거실장 밑으로 손을 깊숙이 넣어봤다. 새카만 먼지가 묻어 나왔다. 이제는 정말 바닥을 손걸레로 마무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화장실의 불을 켜고 들어갔다. 욕조와 세면대의 수도꼭지가 거울처럼 깨끗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세면대를 자세히 들여 다봤다. 먼지와 물때가 그대로였다. 욕조 바닥은 손가락이 닿자마자 미끈거렸고 욕조의 가장자리를 따라 누런 때가 끼어 있었다. 한 마디로 청소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수도꼭지만 빛나는 것이 황당했다. 시간이 없어서 이번 주는 화장실 청소를 못했다고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수도꼭지만 반짝반짝하게 닦아놔서 얼핏 보면 화장실 청소를 한 것처럼 보이게 해두었다. 더는 참기 힘들었다. 아주머니께 다음번부터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려고 마음먹었다. 몇주를 참고 참아왔던 말 이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자 아주머니가 외투와 목도리를 팔에 걸쳐들고 옷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입을 열었다.
"새댁, 나 다음 주부터 못 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금요일에 격주가 아니라 매주 와달라는 집이 있어서 우리 집에는 더이상 못 오겠다고 했다. 분명히 아주머니를 그만두게 하려고 했었는데, 내 입에서는 왜인지 "저희 집도 매주 오셔도 돼요. 다음 주부터 매주 오세요" 하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 업체와 이야기가 끝났다면서 심지어 지난주 금요일에는 이미 그 집에 첫 출근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 마지막 출근을 하려고 그 집에 특별히 하루만 양해를 구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얘긴 안 하려 그랬는데.”
현관 바닥에 앉아 신발 끈을 묶던 아주머니가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점심시간 끼어 있으면 대충이라도 먹을 거는 주고 그래야 아줌마들이 좋아해. 새댁이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던 외투와 목도리를 주섬주섬 주워 걸치며 덧붙였다.
“참, 아마 업체에서 전화가 갈 거예요. 연회비 내라고."
"갑자기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