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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한줄

[책한줄] 한 스푼의 시간

by 신바람~독서 2022. 10. 26.

사람의 시체가 아니다. 그때 그 물건의 등에 깔린 두툼한 흰색 제본지를 발견한다. 해독 불가능한 영문의 홍수 속에서 그는 하나의 단어를 알아본다. ROBOT.

 

명정은 누구에게도 그런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남겨진 이들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이제는 없지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살아 있는 누군가는 사무 행정 절차에 불과하더라도 그의 시신을 거두고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은결은 남겨지는 이가 아닌 동시에 철저히 남겨지는 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은결의 왼쪽 카메라는 완전히 기능을 잃었다. 외관상 문제없으나 그 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 사람으로 치면 시신경 상실에 해당하는데, 좌우 카메라를 함께 켜면 왼쪽 눈에는 흑백 노이즈가 심하게 맺혀서 전체의 상이 왜곡되므로 차라리 왼쪽을 아예 끄는 편이 나았다. 그 밖에는 오른쪽 손목과 왼쪽 무릎의 접합부가 영구 훼손되어, 보행과 행동은 가능하나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아슬아슬하다.
그나마 휴가를 받아 나오기 무섭게 수상한 예감이 들어서 시호와 함께 들이닥친 준교가 신속 건조 처치한 덕분에 최소한으로 입은 외적 손상이다.

 

어느 날 밤 자정이 가까웠을 때 주인의 담배가 떨어져서 사러 나간 은결은 편의점에 들어가기 직전 넓은 통유리 안쪽에 비치는 시호와 한 남자를 본다.
두 사람은 편의점 이름이 적힌 같은 색 조끼를 입었고 주류 상자를 나르다 서로의 허리를 간질이며 웃는다. 남자가 시호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시호가 고개 돌려 남자의 머리를 토닥거린다.

두 사람의 손에서 뭔가가 저 
마다 반짝이기에 은결이 줌인하여 보니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빛난다. 통유리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은결은 문득 발길을 돌려 한 블록 너머 다른 편의점을 찾아 나선다. 담배를 받아든 명정은 평소보다 20분 넘게 시간이 더 걸린 이유를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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