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시체가 아니다. 그때 그 물건의 등에 깔린 두툼한 흰색 제본지를 발견한다. 해독 불가능한 영문의 홍수 속에서 그는 하나의 단어를 알아본다. ROBOT. |
명정은 누구에게도 그런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남겨진 이들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이제는 없지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살아 있는 누군가는 사무 행정 절차에 불과하더라도 그의 시신을 거두고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은결은 남겨지는 이가 아닌 동시에 철저히 남겨지는 이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은결의 왼쪽 카메라는 완전히 기능을 잃었다. 외관상 문제없으나 그 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 사람으로 치면 시신경 상실에 해당하는데, 좌우 카메라를 함께 켜면 왼쪽 눈에는 흑백 노이즈가 심하게 맺혀서 전체의 상이 왜곡되므로 차라리 왼쪽을 아예 끄는 편이 나았다. 그 밖에는 오른쪽 손목과 왼쪽 무릎의 접합부가 영구 훼손되어, 보행과 행동은 가능하나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아슬아슬하다. 그나마 휴가를 받아 나오기 무섭게 수상한 예감이 들어서 시호와 함께 들이닥친 준교가 신속 건조 처치한 덕분에 최소한으로 입은 외적 손상이다. |
어느 날 밤 자정이 가까웠을 때 주인의 담배가 떨어져서 사러 나간 은결은 편의점에 들어가기 직전 넓은 통유리 안쪽에 비치는 시호와 한 남자를 본다. 두 사람은 편의점 이름이 적힌 같은 색 조끼를 입었고 주류 상자를 나르다 서로의 허리를 간질이며 웃는다. 남자가 시호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시호가 고개 돌려 남자의 머리를 토닥거린다. 두 사람의 손에서 뭔가가 저 마다 반짝이기에 은결이 줌인하여 보니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빛난다. 통유리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은결은 문득 발길을 돌려 한 블록 너머 다른 편의점을 찾아 나선다. 담배를 받아든 명정은 평소보다 20분 넘게 시간이 더 걸린 이유를 묻지 않는다. |
'인상깊은한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한줄] 일의 기쁨과 슬픔 (0) | 2022.11.12 |
---|---|
[책한줄] 코로스 사이언스 (0) | 2022.10.26 |
[책한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2) | 2022.10.12 |
[책한줄] 기억전쟁 (0) | 2022.10.12 |
[책한줄] 머니패턴 (1) | 2022.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