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를 피하는 방법은? 『1984』와 『멋진 신세계』두 소설은 여러 차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무엇일까? 우선 두 소설에서 묘사되는 사회는 모두 인간이 두드러지는 것, 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두 다 집단행동이다. 『1984』에서는 훨씬 더 기계적인 행동이 나타나서, 퇴근한 후 집에 혼자 있으면 텔레스크린에서 계속 무언가를 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잠들기 전까지는 혼자서 가만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은 항상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함께 떠들고 즐기는 등 쾌락을 도모한다. 그리고 이 두 소설 모두에서 과거가 부정된다. 지난 역사에 대해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미래를 기획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과거를 아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어 있다. 또한 개인은 생각할 시간이 없다. 한쪽에서는 감시 때문에, 또 한쪽에서는 즐거움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없다. 사랑할 시간도 없다. 한쪽에서는 사랑이 금지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에서는 모두 다른 언어들이 쓰이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공통점이다. 「1984』에서는 뉴스피크라는 대체된 언어를 구사하며, 멋진 신세계』에서는 특정 단어를 음란한 언어로 규정하면서 이런 단어의 사용에 주의한다. 결국 디스토피아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가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극복한다든지 혹은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고, 지금껏 어떤 길을 밟아서 여기에 왔는지, 즉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누군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속한 세상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프랑켄슈타인』 소설 속에서 과학자가 괴물을 만든 동기는 생명의 비밀을 파헤쳐서 직접 창조해보고 싶다는 데 있었지만, 희곡 『R.U.R.』에서 로봇 제작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존재, 즉 노예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R.U.R.』은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로봇은 체코어로 '고된 노동'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R.U.R.』에서 묘사한 미래 사회에서도 로봇을 노예처럼 부리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로봇해방운동가들이 나온다. 여주인공인 헬레나도 그중 한명이었다. 등장하는 주요한 로봇 중 하나인 라디우스는 헬레나에게 로봇의 감정을 표출한다. 그는 “나는 어떤 주인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고 싶다”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왜 충실하게 인간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이 인간의 주인이 되길 원하게 되었을까? 희곡에서는 로봇 제작을 총괄하던 갈박사가 로봇의 성격을 변경했음이 밝혀지는데, 사실 그는 헬레나의 요구를 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로봇해방운동가 출신인 헬레나는 인간이 감정 없는 로봇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이 두려웠고, 묵묵히 일하는 로봇이 무서워서 로봇에게 일종의 인간성을 부여했다고 고백했다. 로봇이 인간과 같아지면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희곡 『R.U.R.』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에 남은 한명의 인간이 로봇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장면이다. 로봇은 아이를 만들지 못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한 사람의 인간을 살려두었다. 그로 하여금 로봇이 인간처럼 아이를 낳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달라는 의도였다. 그 사람은 서로 연인 관계에 있는 로봇 커플 중에서 남자를 데리고 실험을 하려 했는데, 여자 로봇이 실험을 하면 남자 로봇이 죽을 수 있으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다. 그래서 여자 로봇을 가지고 실험을 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남자 로봇이 자신을 대신 실험 대상으로 삼으라고 간청한다. 이때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간은 로봇이 생명력을 가진 존재가 됐고, 이들이 새로운 세상의 아담과 이브가 됐다고 느낀다. 로봇들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로봇이 힘만 센 존재였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로봇이 인간의 희생, 감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났다. 그는 이때부터 로봇이 인류를 대체하게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
일제강점기에 저술된 많은 소설에서 전기 기술은 놀라움의 대상에서 일상으로 바뀌어가는 형태로 재현되었다.식민지 조선에서의 전기는 분명히 당시의 빠른 변화를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1920~30년대 일제강점기 소설 중에는 전기를 상대적으로 어둡거나, 뭔지 모르게 불편하거나, 기계적으로 차갑게 묘사한 것들이 많다. 이러한 묘사는 식민지적인 발전의 이면에 존재하는 식민지적 일상의 우울함, 불균형, 무력감, 아이러니와 같은 모순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의식했든 그렇지 않았든, 순수 문학이든 혹은 참여 문학이든, 1920~30년대 소설에서 재현된 전기는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기 힘든 식민지 일상의 불편함을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통해서 드러냈던 것이다." Bernstein은 노벨상 수상자를 연구한 바 있는데, 일반 과학자의 수와 비교했을 때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 중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은 2배, 음악을 하는 사람은 4배, 미술은 17배, 공예는 15배, 작가는 25배, 무용을 하는 사람은 22배 정도 더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한 가지 예술에 준전문가적으로 깊게 몰입했던 사람들이었다. 창의적인 과학자일수록 예술을 병행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과학이 상상력이 필요한 활동이라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대중문화로 과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면? 과학자나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SF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이 부분은 참으로 과학을 잘 이해하고 구현했다' 또는 '이 부분은 틀렸다' 하며 과학적 오류를 찾아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렇듯 작가가 과학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를 작품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곤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과학적 설명의 완결성으로만 평가하려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대중문화는 문화의 일부이다. 문화는 우리가 사고하고 소통하며, 그 결과들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트릭스와 비슷한 것이다. 과학 논문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옳은가를 검증하는 것은 과학자들이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대중문화에 나타난 과학이 얼마나 옳은가, 그것만을 지적하는 것은 문화를 마치 과학에 종속된 것인 양 생각하는 잘못된 태도이다. 괴물이라는 새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같은작품은 과학적으로 틀렸고 따라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실로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보다는 과학의 일부가 녹아든 대중문화가 대체 세상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작가는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는지, 이것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찰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때, 과학은 우리의 문화에 더 튼튼하게 뿌리내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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