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 싫어서? 알고 싶지 않아서?
명령서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는 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는 모든 생존자의 증언이 꾸며낸 이야기가 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유사하다. 국가나 군이 '위안부’ 제도에 관여했다고 증명할 문서 기록이 없으므로 일본군 '위안부'는 사실이 아니라며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두 위증으로 몰고 간다. 특히 '위안부' 부정론자 중 한 사람인 후지오카 노부카쓰(信勝)는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여성을 연행했다면, 명령서가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라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느닷없이 강제 연행으로 제한해버리고는, 강제 연행을 지시한 군의 공식 문서가 없으니 피해자들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몰아붙인다.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이라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전략으로 실증주의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후지오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특정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고, 문서 자료로 확증할 수도 없으니 그들의 증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다. "저 할머니들이 정말로 위안부였다고 보증할 만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사실 부정론자들에게 '증거 (=문서)'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증거' 그 자체가 아니라 '증거의 정치'인 것이다. 부정론자들은 실증주의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다. 즉, 문서가 아니라 기억에 토대한 상대방의 증언이 지닌 허점을 파고들어 기억의 진정성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사용한다.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돈'을 노린 거짓이며, 그 배후에는 일본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국내외의 반일 세력'이 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음모론을 실증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다. 이들의 실증주의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증언의 진정성을 깎아내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실증주의는 사실과 상관이 없다. |
홀로코스트 수기 중 진짜는 작가가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다는 사실에 의존해 자신의 기억을 문서 자료와 대조하는 과정을 소홀히 하는 반면, 가짜는 그 과정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더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는 역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증의 이름으로 증인의 진정성을 무시하고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홀로코스트, 일본군 '위안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등을 부정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널리 발견되는 현상이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기억의 연대를 위해서는 부정론을 재생산하고 있는 '부정'의 국제주의를 깨트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
누구를 향한 사과인가 기억의 역사에서도 용서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가해자들이 용서를 구하기 위해 천근만근 무거운 입을 떼는 것부터가 어렵다. 어렵사리 입을 뗀다고 해도, 들릴 듯 말 듯 허공에 대고 속삭이는 걸 보면 진짜 용서를 구하는 건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또 대부분 본의가 아니었다거나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거나 왜곡되어 전해졌다는 식의 변명이 앞선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다기보다는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사죄하는 척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
양심의 가책과 도덕적 정당성 1990년 제1차 걸프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Bonn)의 이스라엘 대사관에는 독일 사람들의 전화가 밤낮없이 이어졌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화한 그들 중에는 만에 하나라도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아이들을 맡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돌려보내도 되겠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사담 후세인과 아돌프 히틀러가 종종 유비되는 상황에서 당시 독일인들이 이스라엘에 보낸 우려는 충분히 이해된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독일 민족의 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전화한 평범한 독일인들의 격한 반응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깃들어 있지만, 일종의 도덕적 위선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속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덕성을 인정받으려는 몸짓과 양심의 가책은 분명히 다르다. 남에게서 자신의 도덕성을 인정받으려는 데서 오는 그 위선은, 끔찍한 죄를 저질렀지만 이미 회개한 우리가 이제 세상의 악을 제거할 것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과 연결되어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과거와 대면할 때 극단적인 자기 부정에 몰두하는 일부 독일인에게서 진정한 양심의 가책보다는 과시를 위한 도덕주의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역사에서 배운 게 있고, 그래서 나치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의 일을 회개했다고 양심의 가책이 덜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양심의 가책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회개는 또 다른 이기주의일 뿐이다. |
'인상깊은한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한줄] 일의 기쁨과 슬픔 (0) | 2022.11.12 |
---|---|
[책한줄] 코로스 사이언스 (0) | 2022.10.26 |
[책한줄] 한 스푼의 시간 (0) | 2022.10.26 |
[책한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2) | 2022.10.12 |
[책한줄] 머니패턴 (1) | 2022.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