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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원독서모임

[잠원-독서모임] 10월 12일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 기억 전쟁

by 신바람~독서 2022. 9. 30.
■ 모임일시: 10월 12일(수) 저녁7시~8시
■ 모임장소: 줌(ZOOM)
■ 주제도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 치누아 아체베 지음 / 출판사 민음사
     * 아프리카문학/부커 상 수상 작가/제국주의/탈식민주의
■ 추가도서(주제도서 이후 시간남을시) : 기억 전쟁: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 임지현 지음 / 출판사 휴머니스트
     * 전쟁사/교양세계사/기억연구/제노사이드
■ 독서를 못하신 분들도 참여가능하오니,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yes24 - 출판사 리뷰 ( http://www.yes24.com/Product/Goods/2844076

 

책속에 나오는 식물에 대한 참고 자료 입니다. 

https://knagstory.tistory.com/13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 참고 자료

책속에서 얌 과 콜라 라는것이 나오기에 찾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에서 두 가지의 식물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얌과 콜라 얌은 주식으로 콜라는 손님이 오게 되거나 특

knagstory.tistory.com

책속에 나오는 이 용어가 뭐였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보 용어라고 책 마지막에 있었내요. 

https://knagstory.tistory.com/14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 참고 자료 - 2 ( 이보 용어 )

책속에 나오는 이보 용어 들에 대한 부분 입니다. 책을 보면서 이런 느낌이겠지 하면서 보았는데, 귀찮음을 무시 할수 없었습니다. 책 뒤를 한 번 넘겨 보았어야 했는데요. 아쉬움이 남는군요.  

knagstory.tistory.com

 

출판사 리뷰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가 아프리카 소설로는 처음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171번)으로 출간되었다. 아체베가 불과 스물여덟의 나이에 발표한 이 작품은 1958년 초판이 발행된 후 전 세계에 45개국어로 출간되어 8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19세기 말 아프리카 우무오피아 마을이 폭력적인 서구 세력의 유입으로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 낸 이 작품은 아프리카 탈식민주의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폭력적인 서구 세력에 맞서 부족의 문화와 풍습을 지키려는 한 남자의 숭고한 이야기
19세기 말 아프리카. 오콩코는 용감한 마을 남자들에게만 수여되는 ‘칭호’를 지닌 사람으로서 많은 부족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오콩코의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또한 밭일을 하지 않고 빌린 돈을 갚지 않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오콩코는 아버지가 죽은 후 당시 주식처럼 여겨지던 얌 종자를 이웃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시작해서 점점 가세를 늘려 나간다. 마을 씨름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을 거머쥐거나 전쟁에 앞장서는 등, ‘남자’로서의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바로 이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친아들처럼 아끼던 소년 이케메푸나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후회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이케메푸나를 친형처럼 따르던 오콩코의 아들 은워예는 이에 큰 충격을 받고, 훗날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실수로 마을 아이까지 죽인 오콩코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그 무렵 우무오피아 마을에는 백인들이 서서히 찾아든다. 백인 선교사는 통역사를 앞세워 마을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부족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들을 깔보고 무시하며 버림받은 ‘악령의 숲’을 교회 부지로 내 주기까지 한다. 죽음의 땅에서 모두들 저주를 받을 거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점점 세력을 키워 나간다. 부족의 관습에 의해 버려졌거나 소외당했던 이들, 가부장적 제도에 억압받고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살았던 여성들이 교회에 흡수된다. 이렇게 세를 확장한 백인들은 곧 학교를 지어서 부족 아이들을 서구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하고, 급기야 법원을 세워 부족민들을 그들의 법대로 다스린다.
7년 만에 마을로 돌아온 후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던 오콩코는 부족이 백인 세력과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선뜻 나서지 못한다. 오콩코는 부족을 대표하는 몇몇과 교회에 쳐들어간다.

제국주의 세력과 부족 세력의 충돌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 탈식민주의 문학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가장 널리 알려진 아프리카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이며, 이미 4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80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다. 19세기 중후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속속들이 복원해 낸 이 작품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가장 아프리카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작품”이 된 셈이다.
서양이 아프리카에 대한 수탈과 침략을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 노예무역을 통해서였다. 특히 영국은 17세기 중반 이후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 그리고 유럽을 잇는 삼각무역 구도를 통해 자국의 부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는 제도를 구축했다. 영국이 이 노예무역에 머물던 단계를 지나 직접 아프리카 내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1841년부터 시작된 리빙스턴의 선교 활동과 탐험이 그 선발대 역할을 했다. 영국은 1861년 라고스를 점령하고, 1900년에 남부와 북부 나이지리아에 각각 독립적인 보호령을 만들었으며, 1914년에는 둘을 통합하여 나이지리아 식민국을 세웠다. 그리고 1960년 나이지리아가 공식적인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아프리카만의 전통을 1세기 만에 산산이 부숴 버렸다.
이 작품의 배경은 바로 영국이 아프리카 대륙에 들어선 그 시기다. 하지만 치누아 아체베는 이 소설을 통해 ‘침입자’인 백인들에게 무작정 책임을 묻거나 그들을 비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의 세계는 왜 이토록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나?” 하는 질문을 그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던진다. 우무오피아 마을에 처음 찾아온 선교사는 낯선 땅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고 알아 가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어른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종교적 사상을 교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마을 주민들은 백인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할 뿐이었다. 부족민들로부터 버림받고 괄시받던 ‘약한 자’를 백인들이 감싸 안아 줄 때에도 우무오피아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서구 세력과 맞서 싸우고 삶의 터를 지켜야 한다는, 오콩코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힘을 합치지 못했다. 치누아 아체베는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몰락의 ‘씨앗’이 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가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아프리카 부족의 풍습과 문화를 세세하게 기록한 인류학 보고서
치누아 아체베는 자신의 토착어인 이보어 대신 영어로 이 작품을 썼다. ‘낯선’ 문화를 세계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게’ 전달하는 가장 적절한 언어가 바로 ‘영어’인 것이다. 하지만 아체베는 이보족이 사용하는 용어만은 그대로 소설에 옮겨 놓음으로써 직접적인 문화 교류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 문화를 세세하게 기록하고 알리려는 그의 이러한 노력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매 페이지마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무오피아 마을에 징 소리가 울려 퍼지면 다음 날 마을 남자들은 장터에 모여야 한다. 그중 칭호를 받은 몇몇 남자들은 선조들로 분장을 해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선조들이 길을 지나갈 때면 여자들은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이들은 불행이 닥쳤을 때 혹은 이웃과 불화가 일어났을 때 ‘아그발라’라는 신을 찾아 앞으로 운명이 어떤지 점을 치고, 돌아가신 조상님 영령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돌려 마시고 남은 진한 야자주는 정력에 좋기 때문에 아내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가 마신다. 또한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신랑 쪽 집안과 신부 쪽 집안 어른들이 모여 잔가지 다발을 돌린다. 이 다발에 가지를 더하거나 빼면서 신부 값을 결정하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는 ‘오그반제’로 취급한다. 오그반제란 죽으면 어머니의 배 속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났다가 또 죽는 것을 반복하는 사악한 아이다. 또한 이들은 쌍둥이가 태어나면 악령의 숲에 버린다. 악령의 숲이란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악의 기운으로 가득한 땅이다.
오콩코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19세기 아프리카 부족 마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 준다. 또한 등장인물 간의 대화, 어머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옛이야기, 마을 어른이 젊은이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 등을 통해 이들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치누아 아체베는 이러한 풍경들을 시종일관 객관적인 문체로 서술해 나간다. 소설적 과장이나 묘사를 최대한 배제하였기에 이 소설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 마지막에 백인 치안판사가 오콩코의 죽음을 자기 논문에 끼워 넣는 구상을 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하나의 ‘인류학 보고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기억 전쟁

yes24 - 출판사 리뷰 ( http://www.yes24.com/Product/Goods/69239240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기억은 미디어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우슈비츠에 관한 영화들 중 쉰들러 리스트가 있었지만, 아돌프 아이히만 관련 영화도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중에 하나라고 보아서 참고 자료로 링크 달았습니다. 

 

기억 전쟁 참고 자료 ( https://knagstory.tistory.com/15)

 

[기억전쟁] 참고 자료 - 1 ( 아우슈비츠 )

아우슈비츠에 대한 부분 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및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 "우리는 공무원이며 국가를 위한 행위일 뿐이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이야기

knagstory.tistory.com

 

출판사 리뷰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으로서의 ‘기억 연구(Memory Studies)’


‘기억 연구’, ‘기억 전쟁’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아직 생소하다. 역사학 방법론이 문서와 기록을 근거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심문하고 재단하는 데 치우쳐 있다면, 기억 연구는 산 자가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응답해 죽은 자의 억울함을 산 자들에게 전해주는 영매 역할을 자임한다. 문서와 기록이 중심이 된 공식기억보다 개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적이고 친밀한 영역에 있는 풀뿌리 기억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로써 국가주의적 · 민족주의적 기억 문화와 실증의 이름으로 진짜와 가짜, 가해자와 희생자로 나누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역사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기억 연구에서 ’증언‘은 왜 중요한가? 기억 연구는 기존의 실증주의적 역사 방법론에 회의를 품고 이를 성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대체로 힘 있는 가해자가 역사적 서사와 관련 문서를 독점하고 있는 데 비해, 힘없는 풀뿌리 희생자가 가진 것은 경험과 목소리, 즉 기억과 증언뿐이다. 그런데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부정확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일본군 ‘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들에 의해 ‘실증’의 이름으로 무시되거나 그 가치가 훼손되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증언은 문서와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정성’을 품고 있다. 저자는 “기억 연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역사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실증주의적 역사에 비추어 기억 연구에는 다른 무엇보다 윤리적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1961년에는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재판이 열렸다. 재판을 지켜본 연구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에 주목했고, 이를 계기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문서 자료에서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서서히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 기억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히만 재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증언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말이다. …… 이는 훗날 역사 연구에 ‘감정의 전회(emotionalturn)’라는 패러다임적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감정의 전회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회의를 품고 이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했다. 문서만이 과거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는 실증주의의 폭력에서 증인들을 보호할 장치들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그 밑에 깔려있었다.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중에서

심리학자인 도리 라우브(Dori Laub)는 …… ‘지적 기억’ 대 ‘깊은 기억’이라는 대조법을 통해 ‘사실’과 ‘진실’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사건을 기록한 문서보다 부정확한 증언이 더 진정한 과거를 말해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1944년 10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당시 “굴뚝 네 개가 폭파됐다”는 어느 생존자의 증언은 역사가들에게 거짓이라고 무시되어왔다. 이 증언은 폭파 현장에 굴뚝이 하나뿐이었던 사실과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라우브는 오히려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 증언이 더 진정성이 있다는 신선한 해석을 내놓았다. 라우브에 따르면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때, 인간은 그것을 과장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굴뚝 하나가 사실에 부합하는 ‘지적 기억’의 영역이라면, 사실과 모순되는 굴뚝 네 개는 ‘깊은 기억’의 영역인데,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은 대개 ‘깊은 기억’에 속한다. 아우슈비츠 폭동을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은 사실과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긋나기 때문에 더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 이 재현의 역설은 증언과 문서 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중에서

제대로 된 기억 문화를 위해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전 지구적 기억의 연대를 위하여


누가 더 큰 희생을 치렀는지 경쟁하는 희생자 민족주의와 나치의 공범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거나 일제 침략의 역사 위에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역사를 덮어쓰는 등 기억의 정치가 난무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들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고, 터키계 독일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떠올리고,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가 파괴된 바르샤바 게토에서 흑인 노예들의 아우성을 듣는 등 뜻밖의 장소에서 생면부지의 기억들이 만나 소통하고 연대한다. 이렇게 민족과 국경에 갇혀 있던 기억들이 서로 만나 얽히고 경합하고 연대하는 ‘기억의 지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제대로 된 기억 문화를 위해 무엇을 물어야 할까? 이 책에서는 ‘가해자가 어떻게 희생자로 둔갑하는가?’, ‘민족주의는 어떻게 공범자를 희생자로 만드는가?’, ‘전사자 숭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선량한 학살자는 있을 수 있는가?’, ‘죽음을 무릅쓰고 탈영한 자들은 죽기 살기로 싸운 자들보다 비겁한가?’, ‘국적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는 것은 정당한가?’ 같은 날 선 질문들을 던지며 전후 기억의 문제를 직시한다. 이러한 성찰적 질문이야말로 민족과 국경을 넘는 기억의 터를 만들고, 전 지구적 기억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이로써 전후 역사를 풀뿌리 기억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희생자의 억울함을 풀고, 역사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색다른 비(碑)의 제막식이 열렸다. …… 이 비는 특이하게도 나치의 군사재판에 희생된 오스트리아인 탈영병을 위한 기념비였다. …… 전후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인들은 자신들을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로 기억해왔다. 그러나 이 기억은 조작된 것이다. 통계를 보면 적어도 인구 비율상으로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인들보다도 더 적극적인 히틀러 협력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인들이 스스로를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라고 규정하면서도 히틀러의 군대에 복무한 자국 병사들을 의무를 다했다거나 심지어 영웅적이었다고까지 여겨왔다는 점이다. 반면 히틀러의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들은 ‘전우를 버린 배반자’로 인식해왔다. 그런 오스트리아가 수도의 중심부에 탈영병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는 것은 어쨌거나 사회적 기억에 변화가 있었다는 징표이다. ―「전사자 추모비와 탈영병 기념비」 중에서

폴란드인은 때때로 소극적 방관자를 넘어 그 이상으로 행동했다. 나치점령기 폴란드에서는 숨어 있는 유대인을 밀고하거나 사라진 유대인 이웃의 재산을 탐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 유대인을 사냥하듯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일명 슈말초브니치szmalcownicy)도 있었다. 더욱이 일반 범죄자를 대상으로 거리의 치안을 담당하는 폴란드인 ‘청색 경찰’의 존재는 폴란드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조직적으로 나치에 협력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일부나마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의 공범자였다는 사실은 희생자 민족이라는 폴란드의 역사적 이미지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시즘에 영웅적으로 맞서 싸운 사회주의 전사들의 나라라는 폴란드의 국가적 이미지도 크게 흔들릴 것이었다. 이들에게 홀로코스트에 협력한 과거는 자기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침묵하고 말소해야 할 기억이었다. ―「공범자가 된 희생자」중에서

히틀러와 나치 수뇌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곤란하다. 동유럽의 학살 현장에서 실제로 유대인을 죽인 것은 나치 수뇌부의 펜이나 명령이 아니라 평범한 독일 병사의 소총이었다. 구조가 사람을 학살할 수는 없다.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 나치의 학살 기계도 현장에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살 명령을 내린 권력자뿐만 아니라 학살 기계를 작동시킨 아주 평범한 실행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평범한 독일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 나는 (나치의) ‘101 예비경찰대대’의 평범한 아저씨들이 유제푸프에서 저지른 유대인 학살과 그에 얽힌 기억을 힘들게 돌아보는 내내 광주를 생각했다.
―「1942년 유제푸프와 1980년 광주」 중에서

2013년 7월 30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기억 활동가들이 미국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도서관 앞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 왜 하필 글렌데일이었는지 물어야 한다. 이는 해외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글렌데일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아마도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 대한 기억이 글렌데일의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일본군 ‘위안부’의 기억이 미국의 버건 카운티와 글렌데일에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나 미국 노예제, 홀로코스트 등의 기억과 만난 것은, 이 기억이 민족의 기억을 넘어서 트랜스내셔널한 보편 기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뗀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일본군 ‘위안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미국의 노예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만난 적은 없겠지만, 생존자들과 그 자손들은 글렌데일의 소녀상 프로젝트나 버건 카운티의 ‘위안부’ 기림비처럼 그 아픔을 기리는 기억 속에서 만났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와 일본군 ‘위안부’」 중에서

2006년 11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조선인 B·C급 전범 86명 가운데 83명이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행위에 따른 피해자’로 위원회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한국 사회의 공식 기억에서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되었다. 전범으로 몰려 처벌받은 조선인 군무원들을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로 기억하려는 한국 사회 공식 기억의 논리는 자기방어적이다. …… 개별 가해자가 민족의 이름으로 희생자 집단에 숨어 희생자로 둔갑하는 기억의 마술은 위험한 속임수다. 식민지 피지배 민족 혹은 피점령 국가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개인의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국적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는 기억의 코드는 위험천만하다. …… 지원병으로 나갔다 돌아오면 순사나 면사무소 서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제국의 제도를 타고 넘으려 했던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친일파’ 딱지를 붙이자는 게 아니다. 조선인 군무원이든 지원병이든 개개인의 가학행위를 따지지 않고 어쨌든 식민지 조선인이므로 그들도 모두 피해자였다는 주장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을 모두 친일행위자로 몰거나 반대로 피해자로 뭉뚱그리는 양극단은 모두 풀뿌리 기억에 대한 공식적 기억의 폭력이다. ―「경계의 기억, 기억의 경계인」 중에서

한국 언론이 『요코 이야기』에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일본=가해자’ 대 ‘한국=희생자’라는 이분법이 흔들리는 상황에 당혹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그려진 ‘가해자 한국인’이라는 이미지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역사적 정당성을 저해하는 데 대한 불편함도 있었을 것이다. …… 한국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보여준 과잉반응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요코 이야기』가 ‘한국 때리기’에 맛들인 일본의 우익 출판사에서 일본어로 번역·발간된 것이다. 결국, 한국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일본 사회에서 히키아게샤 이야기(引揚者物語)의 풍요로운 문학적 유산에 가려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요코 이야기』를 부각시킨 것이다.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에서 작동하는 한일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가 이렇게 그 비밀을 슬그머니 드러냈다. ―「수난담의 기억 정치」 중에서

전후세대는 어떻게 전쟁,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와 마주하는가?
―전후세대에게 ‘기억의 책임’을 묻다


역사는 지금 우리와 상관없는 과거일 뿐인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은 야만의 시대의 이정표일 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인가? 전후 세대는 과거로 인해 만들어진 오늘의 혜택을 입고 있으므로 어떠한 형식으로든 과거와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 세대에게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고 성찰하고 또 그 성찰의 기억을 지키고 끊임없이 재고해야 할 ‘기억’의 책임이 있다. 서구의 식민주의와 나치즘, 홀로코스트, 아파르트헤이트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한국 사회에도 식민지배, 일본군 ‘위안부’, 베트남 전쟁, 민주화 운동 등 ‘기억의 책임'을 고민해야 할 과거의 비극들이 존재한다. 이 책은 우리가 비극에 대한 기억의 책임을 어떻게 지고 나갈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전후 세대가 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찾아가는 공론의 장을 제공한다.

기억 전쟁에서는 ‘집합적 유죄’의 논리로 가해 민족 전부를 단죄하거나 피해 민족 모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집단 심성이 그야말로 완강하다. 독일의 전후 세대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이유는 그들이 독일인 혹은 일본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스라엘이나 폴란드, 한국의 전후 세대는 참으로 떳떳하다. 희생자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강의 도중 학생들한테서도 그런 태도를 발견할 때가 적지 않다. 그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지를 묻는다. 베트남전쟁이 끝나고도 20여 년이 지나 태어난 세대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을 책임질 수 없다고 답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묻는다.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자네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왜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끝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한 통치에 대한 책임을 묻는가?”
―「에필로그」 중에서

한 독일인 친구가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살아생전에 자기 어머니가 끔찍이도 소중히 여기던 어떤 도자기에 대한 기억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친구는 그 도자기가 옆집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면서 싼값에 내놓은 물건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에게 유대인 이웃이 남기고 간 그 도자기는 이 평범한 가족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나치의 범죄에 연루되었음을 보여주는 힘겨운 기억의 물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해주는 내내 그 친구의 얼굴에서 곤혹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친구의 곤혹스러움은 ‘연루된 주체’로서의 전후 세대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과 자신의 실존적 관계를 고민할 때 생기는 딜레마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성찰적 기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한다. 그의 곤혹스러운 고민은 과거에 연루된 전후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 비극을 기억할 책임을 어떻게 지고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전후 세대인 그의 고민이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 곤혹스러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며 기억의 주체로서의 그, 곧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 「에필로그」 중에서

임지현 교수의 학문 후반전, ‘기억 연구자’이자 ‘기억 활동가’로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출간한 이래 줄곧 역사학계에 강한 지적 자극을 던져온 역사학자 임지현. 폴란드 근현대사와 유럽 지성사에서 출발해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로 학문적 관심을 넓히며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국사의 해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등 탈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해온 그가 이번에는 ‘기억 연구’를 통해 진짜와 가짜, 가해자와 희생자 사이의 회색지대를 누비며, 전후세대의 역사적 책임을 돌아본다. 민족주의 기억을 탈영토화해 국경을 넘어서는 기억의 연대를 지향하며 서구 중심의 기억 연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차원의 기억 문화를 탐색하는 데 학문적 주안점을 두고 ‘역사가’에서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 책은 …… 죽은 자들의 신원(伸?) 요청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다. 지난 몇 년간 기억 연구를 진행해오면서, 역사가로서의 내 작업은 ‘기억 활동가’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왔다. 나 스스로를 역사가보다 기억 활동가라고 자리매김할 때도 많다. 그러나 죽은 자의 억울함과 원한을 풀어줄 ‘영매’의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영매는커녕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타자의 고통을 껴안고 그것을 내 정의로 삼기에는 인간이 덜 된 탓이다. 지금부터 반성한다고 해도 이미 늦은 감이 있다. 다만 가능성이 무한한 후학들이 죽은 자들의 신원 요청에 응답하는 기억 활동가로 나아가는 데 이 책이 밟고 올라설 만한 디딤돌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