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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한줄

[책한줄] 그리움을 위하여

by 신바람~독서 2023. 4. 12.

그림움을 위하여 / 박완서 / 문학동네 

시차보다도 더 깊은 피로, 뭔지 모를 것을 찾아 여러 생을 헤맨 것 같은 지독한 피로를 이기지 못해 그녀는 따습고 폭신한 둔덕에 점점 깊이 파 묻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후남아, 밥 먹어라. 후남아, 밥 먹어라."
어머니가 저만치 짧게 커트한 백발을 휘날리며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 저 소리, 생전 녹슨 것 같지 않게 새되고 억척스러운 저 목소리, 그녀는 그 목소리를 얼마나 지겨워했던가. 밖에서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나 동무 집에서 같이 숙제를 하고 있을 때도 온 동네를 악을 악을 쓰면서 찾아다니는 저 목소리가 들리면 그녀는 어디론지 숨고 싶었다. 왜 그냥 이름만 불러도 되는 것을 꼭 밥 먹어라는 붙이는지. 하긴 끼니때 아니면 찾아다니지도 않았으니까 그 소리가 꼭 끼니 챙겨 먹이면 할 도리 다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서울에 살다 교외로 이사를 갔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와 약속장소로 가면서 이일 저일 생기며 괜히 이사를 했나? 라는 생각이 들지만, 마지막 택시기사의 말 한 마디에 고민이 눈녹듯 녹아 내린다. 

택시값을 던져주고는 차에서 내려 신호가 바뀌 기 전에 허둥지둥 횡단보도를 건넜다. 저만치 K회관이 바라보이 자 비로소 마음이 놓여 표정을 밝게 가다듬고 품위 있게 걸으려 고 막 폼을 잡아가고 있는데 뒤에서 택시가 한 대 빵빵거리며 다 가와 급하게 내 곁에 멎었다. 방금 전에 타고 온 택시였다. 기사 가 유리를 내리고 천원짜리와 백원짜리가 섞인 잔돈을 내밀면 서, 사모님 거스름돈도 안 받고 내리시면 어떡해요, 하는 게 아 닌가. 그제서야 만원짜리와 오천원짜리를 내고 그냥 내린 생각 이 났다. 너무 신기해서 그럼 이 돈 때문에 일부러 U턴까지 해 왔단 말예요? 하고 물었다. 당근이죠.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생 기긴 소박하다기보다는 촌스럽게 생긴 젊은이였지만 활짝 웃는 잇속이 희고 깨끗했다.

나는 그게 눈부셔 뭐라고 고맙다는 인사와 칭찬의 말을 합쳐서 한다는 소리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네'였다. 젊은이는 조금도 어리둥절해하지 않고
"사모님 어쩐지 멋쟁이다 싶었는데 외국에서 오래 사시다 오셨나봐요. 그렇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다만 활짝 웃어주었다. 그가 나에게 축복이 되었듯이 나도 그에게 축복이 되길 바라면서.

 

도깨비장난으로 생긴 돈을 도깨비한테 도로 빼앗기지 않으려면 땅을 사는게 수라는 게 시어머니의 믿음이었다. 너희들도 어미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잘 들어둬라. 도깨비는 변덕스러워서 재물을 주기도 잘하지만 뺏기도 잘 한단다. 귀찮다고 아무 데나 부 리고 간 재물을 돌려달라고 나타나면 저기 있다고 재물하고 바꾼 땅덩이를 가리키면, 그 땅 네 귀퉁이에다 말뚝을 박고 거기다가 줄을 매고 밤새도록 영치기영차 땅덩이 떼가려고 용을 쓰다가 새벽에 지쳐서 가버리고 며칠 밤 그러다 만다더라. 땅에 대한 시어머니의 그런 철학과 당시 공무원이던 시아버지 의 정보랄까,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져 여기저기 땅을 조금씩 사 모은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